Edward/나만 알기엔 아까워

한나라당 씨발잡것들..

Edward. K 2008. 1. 24.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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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 #1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801/h2008012318435822000.htm

Link #2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01&eid=Jz9k9+nsJEiapnRBBAJXSzIoj63wRb08&qb=uc7Bt8DPurggwMzIuMOi

Subject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도 무죄 확정...근데 이회충은 한마디 안하니?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검찰은 지난 16일 조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심 판결과 관련,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고 23일 밝혔다. 검찰은 “조 사장에게 적용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이 인정되려면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라는 신분이 인정돼야 한다”며 “하지만 민족일보는 영리법인으로 사회단체에 해당하지 않고, 조 사장을 다른 정당의 주요 간부라고 인정할 증거도 부족해 판결이 번복될 가능성이 낮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설명했다.

검찰의 결정으로, 1961년 민족일보 사건으로 처형당한 조 사장은 47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검찰은 지난해 1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재심사건 1심에서 고 우홍선씨 등 8명에게 무죄를 선고한 데 대해서도 항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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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과 민족일보 조용수 ...
befreepark99 답변채택률  85.9%
2002.11.23 00:22  
민족일보 발행인 고(故) 조용수 씨입니다.
5.16 군사쿠데타가 난 1961년 32세의 나이로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처형되었습니다.
(7월 기소, 10월 사형선고, 12월 사형집행... 놀라울 따름입니다!)
죄목은 `일본 조총련계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 북괴의 활동을 고무 찬양 동조...`했다는 거였죠.
이는, 역대 정권의 조작 사건 죄목에 많이 사용되었던 레퍼토리입니다.

이회창 씨가 등장하는 대목은...
사형을 선고한 당시 혁명재판부에서 이회창 씨가 배석판사였기 때문입니다.
조용수 씨의 사형 선고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가 되거든요.
이 사건은 그 이후로 `사법살인`이라는 오명을 얻게 됩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조작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근거로...
당시 조용수 사장과 간첩 공작금으로 연루되었던 간첩 이영근이라는 사람이...
1990년 노태우(盧泰愚) 정권 시절, 국가에 대한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는 점일 겁니다.

40여년 전의 이 사건이 일반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민주당에서 자민련으로 간 송석찬(국회의원)이 이회창 씨를 공격하기 위해 끄집어 내면서였습니다.
(2002년 4월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와 7월 행정자치위원회에서 있었던 일이지요)

* 답변에 도움 받은 기사 출처입니다 ;
http://www.koreananews.com/1xx/13x/134/134chjung.htm
http://news.empas.com/show.tsp/20020725n04102/?s=45&e=225
http://news.empas.com/show.tsp/20020725n03494/?s=349&e=529
http://kwanhun.com/zq/2000d/43edito.htm
http://www.hankooki.com/lpage/editorial/200209/h200209231805295940.htm

** 질문자님의 궁금증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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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民族日報]  

요약
1961년 약 3개월 동안 서울에서 발행되었던 혁신계 일간신문.

본문
제2공화국 당시인 1961년 2월 일간신문으로 창간되었다. 남북협상과 남북간의 경제·서신 교류 실시 및 남북 학생회담 개최, 중립화 통일·민족자주통일의 추진 등 당시의 혁신계가 내세우고 있던 주장을 적극 지지하는 논조를 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후 반국가적·반혁명적 신문이라는 이유로 발행을 정지 당하여 92호를 마지막으로 1961년 5월 19일 강제 종간되었다.

그 뒤에도 계엄사령부는 이 신문의 창간 자금을 북한에서 들여왔다는 혐의로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趙鏞壽)를 비롯한 간부들을 혁명재판에 회부하였다. 감사 안신규(安新奎)와 논설위원 송지영(宋志英)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사장 조용수는 북한과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언론인 사상 처음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1990년 《민족일보》에서 일했던 동료들에 의해 발행되었던 신문의 영인본 사업의 필요성이 거론되어 양수정 전 편집국장, 하일민(河一民) 4월혁명 연구소장, 《한겨레신문》 송건호(宋建鎬) 사장 등 17명에 의해 영인판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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